블랙아웃 2003

2003년 8월 14일 우린 또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과 캐나다 동부지역 여러 대도시가 정전이 되어버린것이다.

오후 4시쯤, 난 그때 열심히 (?) 회사에서 작업을 하고있었는데 하던걸 저장을 해놓기도 전에 전기가 확 나가버려 다 날려버렸다.  몇분이 지나도 변화가 없자 우린 창문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혹시 또다른 테러가 아닌가 싶어서.
다행히 밖은 소란스럽지가 않아 안심을 했지만 자동적으로 모두 가방을 들고 계단을 이용해 대피를 했다.
뉴욕전체가 정전인데다 지하철도 운행하지않는단 소식을 듣자 Asaf 와 Michael과 난 즉시 다리쪽으로 걷기 시작. 퀸즈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핸드폰까지 먹통이라 남편이랑은 물론 연락도 안됐고 모든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걷는 모습은 당연히 9.11을 연상케 했다.

우린 당연히 혹시 테러일수도 있다고 의심해 무조건 맨하탄에서 탈출을 하고보자 생각했지만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조만간 다시 회복되겠지 하는 생각에 촛불 킨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다렸다. 그새 밖에 “Blackout Party”라고 써붙혀 놓고. (미국사람들의 여유로움은 하여간 알아줘야한다)

다행히 다리위를 걷고있는데 지나가던 천사 봉고차 아저씨가 우리를 다리끝까지 태워준다고 해서 우리는 창문도 없는 봉고차 바닥에 불법노동자들처럼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건넜고, 또다시 거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해 우리 셋중 제일 가까운 Asaf의집으로 걸어갔다.

그 적막함이란.
우리 셋은 집으로 들어왔지만 밖은 전혀 무슨일이 일어나고있는지도 모른채 전기 없이 할수있는 수다만 떨었다.
9.11때 큰 충격을 많이 받은 Asaf는 놀랍게도 그후에 만들어 놓은 비상용 패키지를 꺼냈다. 짚락 비닐안에 알람시계, 미니 후라시, 밧데리, 초콜렛, 돈이 들어있었다.
어두워지자 초를 몇개 켜놨지만 (남자집이라 초도 3개밖에 없어 화장실에 하나, 부엌에 하나, 마루에 하나) 장님이 된듯 답답하긴 마찬가지였고, 그 와중에서도 9시가 되자 뭐라도 먹어야 된다 싶어 성냥으로 가스렌지를 켜 어둠속에서 파스타를 만들었다.
한명은 옆에서 후라시를 들고 서있고 한명은 요리하고…상황이 어찌나 웃기던지 난 자꾸 웃음이 났다. (아직까지 남편이 어디서 뭘하고있는지도 몰랐는데.. )
그날따라 90도도 넘은 더위라 땀을 뻘뻘 흘리는 우리들의 번들번들거리는 얼굴이 촛불에 비칠때마다 현재 상황을 보고 웃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땐 회사에서 서로 깔끔한 모습으로만 대하다가 이게 무슨일이람.

10시가 돼서야 Michael의 부모님과 연락이 되어서 나와 마이클을 차로 데리러 오셨고, 이어서 11시에 집에 들어올수있었다.
차안에서 계속 내가 얼마나 이런상황에 준비가 안되어있는지 깨달았다. 집에 가도 후라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나. (한심하군 정말)
아파트 관리인이 마침 로비에 나와있어 부탁도 안했는데 후라시를 들고 6층까지 같이 올라와줬고 집에까지 들어와 초를 한개 켤때까지 불을 비춰줘서 너무 고마웠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이 트였는지 남편에게 연락이 와 4시간동안 걸어 시댁에 가있다고 했고, 곧 온다고 해서 그때 나도 안심을 했다.

우린 9.11때도 엄청 걸어 남편의 양말 두쪽다 빵꾸가 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게 또 웬일인가..
또 한번의 잊지못할 일. 한번씩 이맘때 일어나는 뉴욕의 해프닝을 이제부턴 준비해야겠다. 당장 다음주에 잘 안신는 운동화를 회사에 갖다 놓을꺼다. 언제 또 몇시간을 걸어야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9.11을 겪은 뉴요커들이기때문인지 모든사람들이 침착했고 서로 돕는 모습을 많이 볼수있었다. 폭동같은것도 없었고 말이다.
단순한 정전에도 혹시 테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야하는 현실이 참 슬프지만 이런일들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사랑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이런일들을 겪으며 우리모두가 하나가 되는게 아닌가 싶다.
아직도 인생은 아름답다 란 생각을 또한번 해본다.
Life is beautiful.

 

 

3 Comments

  1. 은정 · August 16, 2003 Reply

    혜원아, 무사하다니 다행이야, 안그래도 걱정했었는데. 선영이와 난 네가 남편과 그 근처에서 만나 같이 걸어서 집에 갔을거라고 상상을 했었는데…. 틀렸네. ^^

  2. 정윤 · August 17, 2003 Reply

    혜원아 안그래도 걱정했다. 그렇지만 잘 있을거라 생각했고..점점 더 여유를 가지는 혜원이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름다운 생 잘 살자..

  3. 혜원 · August 18, 2003 Reply

    언니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다시 출근했는데 언제 그런일이 있었느냐는듯이 멀쩡해요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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